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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비가 많이 내리는 날, 감성에 젖는 영화보다 식은땀이 흘러 티셔츠가 촉촉하게 젖는 미스터리 스릴러 영화들이 끌릴 때가 있다. 그 영화들 속 눅눅한 공기와 현실의 날씨가 맞닿는 순간, 주변은 어느새 사건 현장이 되고 빗소리는 불길한 배경음이 된다. 비가 단순한 배경을 넘어 불안과 공포, 때로는 사랑의 감정까지 증폭시키는 스릴러 영화들을 모았다.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부터 근본 스릴러 <세븐>, <마더> 등까지. 오늘처럼 비가 내리는 날이라면 영화가 더욱 서늘해질 것이다. 아래 리스트에서 오늘 같이 비오는 날 퇴근하고 보기 좋은 미스터리 스릴러 영화들을 지금 바로 만나보자.

<살인의 추억>(2003)

NETFLIX

감독ㅣ봉준호
출연ㅣ송강호, 김상경, 김뢰하

“비 오는 날, 빨간 옷을 입은 여자가 죽는다.” <살인의 추억>에서 비는 사건을 예고하는 불길한 신호다. 라디오에서 특정 노래가 흘러나오고 어둠이 논두렁을 뒤덮으면, 평범하던 시골 풍경은 단숨에 범죄의 공간으로 변한다. 빗속에서 발견되는 흔적과 진흙투성이 현장은 영화 전체에 씻어내기 어려운 불쾌함을 남긴다.

영화는 범인을 찾는 쾌감보다 끝내 진실에 닿지 못하는 사람들의 무력감에 집중한다. 감에 의존하는 시골 형사 박두만과 서류와 증거를 믿는 서울 형사 서태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사건에 접근하지만, 수사가 길어질수록 둘의 경계는 무너진다. 비가 거세질수록 사람들의 확신은 흐릿해지고, 사건에 매달린 인간이 서서히 망가져 가는 모습만이 선명하게 남는다.

<세​븐>(1995)

WARNER BROS

감독ㅣ데이비드 핀처
출연ㅣ브래드 피트, 모건 프리먼, 귀네스 팰트로

영화가 시작되면 이름 모를 도시에 비가 쏟아진다. 잠시 내렸다 그치는 비가 아니라 골목과 건물, 사람의 표정까지 축축하게 적시는 장대비다. 데이비드 핀처 감독은 도시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이곳을 죄악이 일상이 된 거대한 감옥처럼 그려낸다.

은퇴를 앞둔 형사 서머싯과 혈기 넘치는 신참 형사 밀스는 ‘7대 죄악’을 본뜬 연쇄살인을 추적한다. <세븐>의 진짜 공포는 잔혹한 장면보다 범인이 인간의 본성과 형사들의 감정까지 정확하게 계산하고 있다는 데서 온다. 범인의 정체가 드러난 뒤에도 긴장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마지막 순간까지 모두를 빠져나갈 수 없는 도덕적 함정으로 밀어 넣는다.

<추​격자>(2008)

SHOWBOX

감독ㅣ나홍진
출연ㅣ김윤석, 하정우, 서영희

서울의 비 오는 밤, 좁은 골목길을 가르는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나홍진 감독의 장편 데뷔작 <추격자>는 제목 그대로 달리고 또 달린다. 그러나 이 영화의 긴장감은 범인이 누구인지 몰라서 생기지 않는다. 범인은 일찌감치 모습을 드러내고, 심지어 자신의 범행까지 순순히 털어놓는다. 문제는 모두가 진실을 알고도 한 사람을 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전직 형사 ‘중호’는 자신이 관리하던 여성들이 잇달아 사라지자 그들을 마지막으로 부른 남자를 추적한다. 가파른 언덕과 미로 같은 주택가, 비에 젖은 아스팔트는 인물들이 얼마나 가까이 있으면서도 서로에게 닿지 못하는지를 보여준다. 경찰과 행정 시스템이 시간을 낭비하는 사이 관객은 이미 알고 있는 위험을 바라보며 속수무책으로 초조해진다. 범인을 잡는 순간부터 진짜 추격이 시작되는 잔인한 역설이다.

<셔​터 아일랜드>(2010)

SOCIAL

감독ㅣ마틴 스코세이지
출연ㅣ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마크 러팔로, 벤 킹슬리

거센 파도를 가르며 한 척의 배가 외딴섬으로 향한다. 섬에는 중범죄 정신질환자들을 수용하는 병원이 있고, 환자 한 명은 잠긴 병실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연방보안관 ‘테디’는 실종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섬을 찾지만, 때마침 불어닥친 폭풍으로 외부와의 모든 연결이 끊긴다.

‘테디’가 진실에 가까워질수록 기억과 환상, 음모와 망상의 경계는 흐려진다. 관객은 그의 시선을 따라 단서를 모으면서도 그 시선 자체를 얼마나 믿어야 할지 끊임없이 의심하게 된다. 창밖에 비가 내리는 날 보면 현실까지 섬에 갇힌 듯한 기분이 드는 정교한 심리 스릴러다.

<큐​어>(1997)

NETFLIX

감독ㅣ구로사와 기요시
출연ㅣ야쿠쇼 코지, 하기와라 마사토, 우지키 츠요시

서로 아무런 연관도 없는 사람들이 잇달아 살인을 저지른다. 범인들은 현장에서 곧바로 붙잡히지만, 정작 자신이 왜 사람을 죽였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형사 ‘다카베’는 모든 희생자의 목에 남겨진 ‘X’자 흔적과 사건마다 나타나는 의문의 남자 ‘마미야’를 중심으로 살인 사이의 연결고리를 추적한다.

<큐어>는 범인의 정체나 범행 수법보다 악의가 인간에게 어떻게 스며드는지를 집요하게 바라본다. 축축한 도시와 낡은 건물, 텅 빈 해변처럼 생기 없는 공간 위로 물소리와 불꽃, 반복되는 질문이 이어지며 관객의 감각까지 서서히 흐트러뜨린다. 자신도 알지 못했던 욕망이 누군가의 암시로 깨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영화가 끝난 뒤에도 서늘하게 남는다.

<마​더>(2009)

NETFLIX

감독ㅣ봉준호
출연ㅣ김혜자, 원빈, 진구

아들 ‘도준’이 한 소녀를 살해한 용의자로 체포되자, 엄마는 그의 결백을 밝히기 위해 직접 사건을 파헤친다. 수사는 아들을 구하려는 모성에서 출발하지만, 진실에 가까워질수록 그 사랑은 점차 위태롭고 기괴한 형태로 변해간다. 모두가 ‘도준’을 범인이라고 말할 때 엄마만은 끝까지 다른 답을 찾는다.

김혜자의 얼굴에는 연약함과 집요함, 두려움과 광기가 동시에 떠오른다. 보는 이로 하여금 엄마를 응원하다가 의심하고, 다시 연민하다가 결국 불편한 침묵에 빠진다. 진실보다 아들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한 사람의 처절함과 영화가 남긴 찝찝함은 가히 한국 영화에 길이 남을 찝찝함이다.

<곡​성>(2016)

20TH FOX KOREA

감독ㅣ나홍진
출연ㅣ곽도원, 황정민, 쿠니무라 준, 천우희

낯선 외지인이 산골 마을에 나타난 뒤 주민들이 기이한 증세를 보이고, 끔찍한 사건이 연이어 발생한다. 경찰 종구는 대수롭지 않은 소문으로 치부하지만, 자신의 딸에게도 같은 증상이 나타나자 사건의 중심으로 뛰어든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수사극과 오컬트, 민간신앙과 종교적 공포 사이를 거침없이 넘나든다. 비에 젖은 산과 안개 낀 숲은 아름답지만, 그 안에 무엇이 숨어 있을지 알 수 없어 더욱 불길하다. 수많은 단서가 주어지지만 어느 것도 온전히 믿을 수 없는 영화다.

<버​닝>(2018)

CGV

감독ㅣ이창동
출연ㅣ유아인, 스티븐 연, 전종서

<버닝>은 아주 작은 의문을 남겨두고, 그것이 머릿속에서 천천히 커지도록 기다린다. 유통회사 아르바이트생 ‘종수’는 어린 시절 같은 동네에 살았다는 ‘해미’를 우연히 만난다. 아프리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해미’ 곁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 ‘벤’이 있고, 얼마 뒤 해미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누군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무엇이 거짓인지 확신할 수 없다. 보이지 않는 고양이, 불타지 않는 비닐하우스, 아무렇지 않게 반복되는 하품까지 모든 것이 단서처럼 보이는 동시에 아무 의미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현실과 상상의 경계가 흐려질수록 종수의 의심은 보는 이의 의심이 된다.